
AI 데이터센터 붐으로 전 세계 전력 수요가 폭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GE베르노바, 지멘스, 미쓰비시와 같은 글로벌 전력기기 공룡들은 공격적인 증설을 주저하고 있습니다. 수주 잔고는 두 배로 늘어나는데 생산 능력은 20% 정도만 확대하겠다는 이들의 신중함 뒤에는 2000년대 초반 엔론 사태와 중국·인도 발전 프로젝트 붕괴라는 뼈아픈 역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틈새에서 두산에너빌리티를 비롯한 한국 기업들이 약진하고 있는 이유를 살펴봅니다.
## 엔론 사태가 남긴 깊은 트라우마
전력기기 산업의 조심스러운 행보를 이해하려면 2000년대 초반 엔론 사태를 반드시 짚어야 합니다. 엔론은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사업에서 출발해 '가스 은행'이라는 혁신적 모델을 만들어낸 기업이었습니다. 창업자 켄 레이는 펜타곤과 닉슨 정부에서 에너지 정책에 관여하며 업계 인맥을 쌓았고, 1980년대 후반 천연가스 민영화 물결을 타고 휴스턴 내추럴 가스와 인터노스를 합병해 엔론을 만들었습니다.
엔론의 핵심 비즈니스 모델은 천연가스를 금융상품화한 것이었습니다. 가스 가격 변동성이 큰 시장에서 장기 매수 계약과 매도 계약을 중개하며 스프레드로 수익을 내는 구조였습니다. 마치 은행이 예대 마진으로 돈을 버는 것처럼, 엔론은 실물 가스를 직접 저장하거나 파이프라인을 확장하지 않고도 막대한 이익을 낼 수 있었습니다. 맥킨지 출신 제프리 스킬링이 합류하면서 이 모델은 더욱 정교해졌고, 시가평가 회계를 도입해 10년, 20년짜리 장기 계약을 체결하는 즉시 미래 수익을 모두 장부에 올렸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장부상 수익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실제 현금흐름은 마이너스였습니다. 엔론은 수백 개의 유령 회사를 만들어 부실 자산을 떠넘기고, 은행으로부터 '프리페이'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하며 이를 매출로 둔갑시켰습니다. 더 나아가 1999년 캘리포니아 대정전 사태 당시, 엔론은 의도적으로 전력 공급을 차단해 가격을 70% 이상 폭등시키는 시장 조작 실험까지 감행했습니다. "우리 트레이더의 업무는 수익을 거두는 것이지 캘리포니아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게 아닙니다"라는 임원의 발언은 이들의 오만함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엔론의 천연가스 금융화 성공은 자연스럽게 전력 금융화로 이어졌고, 전기는 저장조차 불가능해 가스보다 변동성이 더 컸기에 투기 대상으로 적합했습니다. 빠른 전력 생산을 위해 가스터빈 수요가 폭발했고, GE, 지멘스, 미쓰비시, 알스톰 등 글로벌 업체들은 대규모 증설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2001년 엔론의 분식회계가 드러나며 주가는 휴지조각이 되었고, 전력·가스 산업 전체의 신용등급이 폭락했습니다. 기존 주문은 취소되었고, 새 프로젝트는 지연되었으며, 막대한 설비 투자를 집행한 기업들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미쓰비시 자료에 따르면 미국 가스터빈 수요는 2000년대 초반 30GW에서 2년 만에 절반 수준으로 급락했습니다. 이는 외환위기급 충격이었고, 알스톰은 결국 구조조정 끝에 해체되었습니다.
## 중국과 인도 프로젝트의 좌초
엔론 사태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두 번째 충격이 찾아왔습니다. 2000년대 중반 중국이 WTO 가입 후 '세계의 공장'으로 급부상하며 전력 수요가 폭증했습니다. GE, 지멘스, 미쓰비시는 중국 시장에서 기술 이전 조건으로 대규모 화력발전소 건설에 참여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자충수가 되었습니다. 상하이전기와 동방전기 같은 중국 기업들이 기술을 흡수해 자체 생산 능력을 갖추자, 글로벌 업체들의 중국 내 수요는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중국은 기술 의존에서 벗어나 자국 기업 육성으로 방향을 틀었고, 외국 기업들은 막대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 밀려났습니다.
인도 역시 비슷한 시기 릴라이언스, 타타 같은 민간 재벌들이 발전 사업에 뛰어들며 초대형 발전소 건설 붐이 일었습니다. 인도 정부는 2005년부터 4GW 이상 규모의 'Ultra Mega Power Project'를 추진했고, 가스터빈 10개 이상이 필요한 대형 프로젝트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러나 2010년 인도네시아가 저가 석탄 수출 정책을 폐기하고 국제 시세에 맞춰 가격을 인상하자, 인도 발전사업자들의 수익성은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타타파워는 원래 저렴한 인도네시아산 석탄을 기반으로 사업 계획을 세웠는데, 원료비 급등으로 프로젝트가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토지 보상 문제가 터졌습니다. 대규모 부지 확보 과정에서 지역 농민과 어민들의 격렬한 반발이 일어났고, 일부 사업자들이 강제 보상을 추진하면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환경단체와 인권단체의 압력으로 해외 금융기관들이 자금 조달을 거부하자, 프로젝트들은 줄줄이 중단되었습니다. 중국과 인도라는 두 거대 시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수요가 사라지자, 글로벌 전력기기 업체들은 또 한 번 깊은 좌절을 맛보았습니다. 특히 2014년 제너럴일렉트릭(GE)이 알스톰의 전력사업부를 106억 달러에 인수한 시점은 최악의 타이밍이었습니다. GE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수였지만, 중국·인도 수요 감소에 더해 전 세계가 친환경 에너지로 전환하며 가스터빈 수요는 장기 침체에 빠졌습니다. 결국 GE는 전력 부문을 분사해 GE베르노바로 독립시켰고, 이는 '영광의 짐'을 떼어낸 고육지책이었습니다.
## 한국 기업에게 찾아온 기회의 창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현재 GE베르노바, 지멘스, 미쓰비시의 신중한 태도가 이해됩니다. GE베르노바는 2025년 인베스터데이에서 "전력화 부문은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돈을 벌어본 적이 없다"며 "공격적인 공장 증설보다는 인력 증원과 생산 효율화로 대응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수주 잔고는 2028년까지 두 배로 늘어날 전망이지만, 가스터빈 생산 능력은 2026년 20GW에서 2028년 24GW로 단 4GW만 확대한다는 계획입니다. 지멘스도 사우디아라비아 다란 공장 면적을 35% 확장하는 데 그치고 있으며, 미쓰비시파워만이 2년 내 생산 능력을 두 배로 늘리겠다고 밝혔지만 이 역시 신규 공장 건설보다는 공급망 효율화와 자동화가 중심입니다.
전력기기 분야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지멘스에너지는 2028년까지 변압기 및 개폐기 공장에 23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기존 투자 대비 20% 증가에 불과합니다. 히타치에너지가 60억 달러라는 공격적인 투자 계획을 세운 것과 대조적이지만, 전반적으로 글로벌 업체들은 '물 들어왔는데도 노를 천천히 젓는' 모습입니다. 이들은 10~20년 회수 기간이 필요한 설비 투자가 5~6년 만에 업황이 꺾이면 막대한 손실로 이어진다는 쓰라린 경험을 두세 차례 겪었고, 그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틈새에서 한국 기업들이 약진하고 있습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가스터빈 생산 능력을 연 6기에서 12기로 두 배 늘렸고, LS일렉트릭, 효성중공업, 현대일렉트릭 같은 전력기기 업체들은 미국에 대규모 공장을 신설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강자들이 과거 트라우마로 망설이는 사이, 한국 기업들은 10여 년간 축적한 기술력으로 공격적인 시장 진입에 성공하고 있습니다. 두산에너빌리티가 이탈리아 안살도를 인수하려다 무산된 뒤 자체 기술로 가스터빈을 개발한 것은 상징적 사례입니다. 안살도 측이 "100년 기업을 동아시아 황인종에게 팔 수 없다"며 거부했지만, 오히려 이것이 독자 기술 개발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한국 기업들도 리스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글로벌 업체들이 "너희가 안 당해봐서 그렇다"며 경고하는 것처럼, 설비 투자 회수 기간과 업황 사이클의 만기 미스매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현재 AI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한 전력 수요 증가는 과거 엔론의 투기적 수요나 중국·인도의 일시적 붐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전 세계적인 전력화(electrification) 추세, 제조업 리쇼어링, 데이터센터 확산은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수요 변화입니다. 한국 기업들에게 부족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레퍼런스였는데, 지금이야말로 그 레퍼런스를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가성비 좋은 제품으로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실적을 축적하며, 글로벌 5위권에서 상위권으로 도약할 수 있는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GE베르노바, 지멘스, 미쓰비시 같은 글로벌 공룡들이 엔론 사태와 중국·인도 프로젝트 좌초라는 뼈아픈 역사 때문에 증설을 주저하는 동안, 한국 기업들은 과감하게 기회를 잡고 있습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안 젓겠습니다"라는 글로벌 업체들의 신중함은 합리적 판단일 수 있지만, 동시에 한국 기업들에게는 시장 진입의 황금 기회입니다. 물론 과거 역사가 주는 교훈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10여 년간 기술을 연마하며 준비해온 한국 기업들에게 지금은 도전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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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물 들어올 때 노 안 젓겠습니다" 전력기기 공룡들이 증설 주저하는 이유 [슈퍼맨 이주호] /
https://www.youtube.com/watch?v=8Hgsn-KQczw